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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reamer mystee
diary/미스티의 삶

우리집 강아지 상순이 이야기

by mystee 2021. 1. 4. 05:00

 


 

2011년의 상순이

 

2001년에 우리 집으로 와서 14년을 함께 살다가 2015년 여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우리 집 강아지 상순이..

지금도 생각만 하면 먹먹해지는 기분 때문에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기까지가 쉽지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여기에 다 쓸 수는 없지만, (특히 마지막에 떠날 때의 이야기..)

더 오랜 세월이 흘러 그나마 가지고 있던 상순이에 대한 기억도 흐려져버리기 전에 우리 집의 선물과도 같았던 상순이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써볼까 한다.

 

 

 

노 리플라이 no reply - 강아지의 꿈

 

♬ no reply - 강아지의 꿈 (2007)

 

 

 

너무 아픈 꿈을 꿨어
니가 날 거리에 두고 떠나가는 꿈을
잠에서 깨 눈 뜨면
희미해진 너의 비누 향기만이

 

지친 하루를 보내고
울며 잠든 널 보면 내가 더 마음이 아파
아이처럼 환하던
니 모습이 떠오르곤 해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그 길을
사뿐사뿐 니 걸음에 날 맞추던
기억나지 않는 노래처럼
희미하게 웃던 아득한 시간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내내 한숨만 쉬며 울음을 삼키는 네게
아무 말도 못한 채
니 옆에서 잠이 들었네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이 길을
사뿐사뿐 니 걸음에 날 맞추던
잊혀지지 않는 사진처럼
환하게 웃던 그리운 니 모습

 

향기로운 여름 바람을 맞으며
푸른 너의 슬리퍼 옆을 걸었던
기억나지 않는 노래처럼
희미하게 웃던 아득한 시간이

 

나 나나나 나나나
나 나 나 나 나나나 나나나
나 나나나 나나나
나 나 나 나 나나나 나나

 

 

만남

 

2003년의 상순이

 

최근 몇년동안은 그런 아줌마를 본 적이 없지만, 아주 예전에는 광주의 충장로 번화가의 길거리에서 새끼 강아지를 파는 아줌마가 가끔 보였었다.

그 당시의 나는 강아지를 키울 수는 없었지만 그런 강아지를 볼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곤 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를 아주 좋아했던 나였지만 강아지를 제대로 키워본 적은 없었다.

 

2001년 말이었다.

당시의 여자친구와 충장로에서 또 강아지를 팔고 있는 아줌마를 발견했다.

그때 본 강아지들은 다른 때 보던 강아지들보다 유난히 귀여웠다. 한 손바닥에 올려질 정도로 작은 새끼였다.

한 생명의 값어치 치고는 너무 싼 가격이었다. (25,0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담이지만 요즘은 그런 아줌마가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충동적으로 강아지를 사서 직접 기르고 보니 안 되겠다 싶어서 버리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나도 그런 무책임한 사람들과 별 다를바가 없었다.

10대 후반의 어렸던 나는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같이 기르자(?)'며 그 강아지를 샀었다.

그게 둘 중에 누구에게서 먼저 나온 말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둘이서 같이 키운다는 것 때문에 한 생명을 책임을 져야 하는 책임감이 조금 분산이 됐던 모양이다.

 

그날 아줌마가 팔던 강아지는 같은 배에서 나온 것 같은 4마리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뭔가 가장 약해 보이고 짠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왔었다.

그리고 그 강아지는 정말로 우리 집에서 일주일, 여자친구 집에서 일주일.. 그렇게 돌아가며 키웠었다. 처음 한두 달 동안은 말이다.

그리고 강아지의 이름은 여자친구의 어머니께서 상순이라고 지어주셨다.

이름에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암컷 강아지였다.

 

 

 

처음부터 위기가 찾아오다

 

2005년의 상순이

 

상순이를 처음 데려온 날부터 그다음 날까지.. 상순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식욕도 없어 보이고, 힘도 없고, 크기도 너무 작아서 '아직 어미의 젖을 먹어야 하는 새끼를 아줌마가 무리해서 빨리 팔아버린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죽겠다 싶어서 바로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동물병원에서는 상순이의 몸에 기생충 같은게 있다고 말했다.

(무슨 충이라고 했는데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심장사상충은 아니었다.)

다행히 병원의 치료와 함께 서서히 식욕도 생겨가고 건강해져갔던 상순이..

 

한 손바닥에 올라가는 작은 새끼였던 상순이를 집에 혼자 둘 수는 없다는 이유로.. 나는 학교까지 상순이를 데리고 갔었다.

당연히 교문에서 난 잡히고 말았고, 그날 하루만 상순이와 함께 학교에서 수업받는 것이 허락되었던 적도 있었다.

 

상순이를 데리고 간 병원에서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솔직히 처음에 상순이를 봤을 때 얼마 못 살고 죽을 것 같아 보였다고 했었다.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병원에 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처음에 병원을 데리고 갔을 때는 병원에 한번만 가면 될 줄 알았었다.

하지만 상순이가 나을 때까지 계속 다녀야했던 병원.. 그 병원비를 낼 돈은 학생이었던 나에게는 없었다.

그 병원비는 우리 엄마가 내줬었다.

강아지를 키우는게 얼마나 큰 책임감이 필요한 것인지 몰랐던 나 때문에 강아지를 죽일 뻔한 것을 엄마가 살려준 것이었다.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상순이는 그 후로 아주 건강하게 살아갔다.

 

 

상순이를 끔찍히 사랑했던 엄마

 

2006년의 상순이, 당시에 필자가 타던 스쿠터와 함께

 

상순이를 우리 집으로 처음 데리고 왔던 날부터 엄마는 상순이에게 빠져버렸다.

상순이가 엄마가 자는 동안에 엄마의 품을 파고들어서 팔을 베개 삼아서 누워 자고 있었고, 거기에 엄마는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상순이가 집에 오고 난 후부터 엄마가 웃는 날이 많아졌다. 난 엄마가 이렇게 강아지를 좋아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상순이가 일주일 동안 여자친구네 집으로 가야할 때면 엄마가 많이 아쉬워했다.

일주일이 지나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런데 사실, 한 강아지가 두 집을 일주일 간격으로 들락날락거리며 산다는 방식이 정상은 아니긴 했다.

 

그리고 10대의 연애는 언젠가는 보통 끝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상순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또 골치가 아플 일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엄마가 직접적으로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에 대해서도 분명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느 날 엄마가 상순이를 완전히 우리가 키우자고 이야길 꺼냈다.

그리고 난 엄마의 의지를 당시의 여자친구에게 전했다. 여자친구는 많이 서운해했지만, 결국 어느 한집에서 책임을 지고 키우는게 낫고, 더 잘 키울 수 있는 곳이 우리 집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상순이는 그렇게 우리 집의 가족이 되었다.

 

 

 

행복했던 날들 즐거웠던 추억들

 

2007년, 화순 고인돌 공원에서

 

2011년, 집에서

 

2011년, 사진을 보니 털 깎은지 얼마 안됐을 때로 추정된다.

 

2011년, 내가 하고 다니는 목도리를 상순이에게 둘러보았다.

 

2011년, 어렸을 때는 귀가 밝아서 자는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자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2012년, 10살이 넘어서도 동안이었던 우리 상순이

 

20대 초중반에 처음으로 샀던 스쿠터를 타고 상순이와 함께 담양도 가고, 화순도 갔다.

스쿠터를 타다가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상순이의 목숨은 보장할 수가 없기 때문에 스쿠터를 자주 태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상순이도 같이 스쿠터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돈 없이 유학을 다녀온 이야기

이 포스팅은 PC로 작성되었습니다. 모바일로 보시는 분들에게는 가끔 줄 바꿈이 어색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정보를 제공하는 포스팅에는 주로 이야기를 하듯이 경어체를 쓰지만, 이 포스팅은

mystee.tistory.com

일본으로 가서 살고 있었던 몇년 동안은 상순이와 함께 할 수가 없었다.

처음 도쿄로 유학을 갔을 때는 그렇다고 쳐도, 나중에 2013년에 오사카로 간 것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오사카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나름의 추억이 있긴 했지만,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에 2년도 안 지나서 상순이가 떠났기 때문에.. 그냥 오사카는 가지 말걸.. 함께 더 오래 있을걸.. 더 잘해줄걸.. 하는 후회를 했던 기억이 있다.

 

 

좋지 않은 예감

 

상순이를 데리고 병원을 갔던 건 2015년 내 생일의 다음날이었다.

그전부터 이상한 징후가 좀 있었는데, 당시에 무심했던 엄마와 내가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상순이의 건강 상태가 뭔가 분명 이상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동물병원을 데리고 갔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처음 데리고 갔던 병원에서 더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가보라며, 어쨌든 징후가 굉장히 좋지는 않다는 점만 이야기해줬을 때, 병원 밖에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병원에서 알게 된 상순이의 병명은 신부전증이었다.

강아지의 신부전증에 대해서 검색하자 여러 가지 증상들이 나왔는데, 이미 몇 달 전부터 상순이가 보여왔던 증상들이었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모르는게 당연했지만 나의 무지를 탓했다.

너무 미안했다. 그 후부터 상순이가 떠나는 날까지 나의 모든 생활을 버리고 상순이 케어에 집중을 했다.

그러면서 '왜 그동안은 이렇게 챙겨준 적이 없었던가'를 또 후회하고 반성했다.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다. 정말 울지 않은 날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상순이 앞에서 울지는 않았다.

안그래도 본인이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을 상순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더 무서워할까봐.. 상순이 앞에서는 절대로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별

 

상순이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지 정확히 한 달 후인 2015년 7월 19일 일요일 아침에 떠났다.

내가 보는 앞에서였다. 엄마는 교회에 가고 없었다.

 

엄마는 상순이가 떠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봐야 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나는 반대로 상순이가 하필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외롭게 혼자 떠나는 것을 싫어해서 제발 내가 있을 때 떠나 줬으면 했다.

그런데 상순이는 그런 나와 엄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엄마가 교회를 가자마자, 내 옆에서 그렇게 하늘로 떠났다.

 

평소에도 사람의 마음을 잘 읽고, 어쩌다 내가 우울할 때면 말은 못 해도 위로해주는 듯한 느낌으로 옆에 있어주던 상순이.. 정말 말은 안 통해도 모든 것을 다 느끼고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끝까지 착했던 상순이는 엄마와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날씨도 좋고 묻어주기 좋은 일요일은 골라서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상순이를 묻은 자리에 꽂아둔 국화꽃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지만 상순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니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쓰던가 하겠다.

(광주의 추천하는 동물병원들과 정말 쓰레기 같은 동물병원에 대해서 기회가 있다면 글을 쓰고 싶다.)

 

 

 

 

상순이가 건강했을 때 찍었던 영상을 마지막으로 글을 줄인다.

 

 

 

 

 

 

 

처음 공개하는 저의 자작곡입니다. MEMENTO MORI

오늘은 블로그를 통해서 처음으로 저의 자작곡을 소개해보겠습니다. 제 자작곡을 소개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지만, 이게 첫 자작곡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걸 알려드립니다. mystee - MEMENTO MORI ♬

mystee.tistory.com

(추가로 쓴 포스트) 상순이가 떠나기 전에 썼던 자작곡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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