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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reamer mystee
diary/미스티의 삶

돈 없이 유학을 다녀온 이야기

by mystee 2019. 11. 28. 23:22

 


제목에는 돈 없이 유학을 다녀온 이야기라고 적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집에서 도움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유학을 다녀온 이야기다.

혹시라도 '돈 없이 유학' 이라고 검색해서 온 분들이 계신다고 할지라도

분명 '진짜 돈 한푼도 안 들이고 공짜로 유학을 다녀오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도와주지 않아도,

가진 돈이 많지 않아도 유학을 다녀올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 검색했을 것이다.

그런 방법이 있기는 있다.

국가에 따라서는 그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나라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유학을 다녀왔었다.

총 유학 기간이 어떻게 됐는지는 처음부터 밝히지 않겠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글이 무슨 대단한 글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제부터 필자는 10년 전에 20대 중반의 나이에 혼자 힘으로 일본으로 가서 지냈었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1.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나는 어려서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할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일본을 자주 왔다 갔다 하셨고,

가끔 일본에서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상대방이 '모시모시' 하면 할아버지를 바꿔줬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는 일본에서 오신 손님이 집으로 온 적도 있었다.

키가 큰 여성분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손님이라고 하기엔 엄마뻘 정도로 젊으신 분이었고,

정말 100% 일본어만 사용하는 일본인을 처음 봐서 신기했던 기억도 난다.

 

 

 

 

내가 기타를 치게 된 계기

이 블로그의 포스팅들은 PC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모바일로 보시는 분들에게는 줄 바꿈이나 문단의 나눔 등이 어색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정보를 제공하는 포스팅에는 주로 이야기를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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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기타를 치게 된 계기' 라는 제목의 포스팅에서도 썼듯이

나는 중2 때부터 일본 밴드 음악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좋아하는 일본 곡들의 가사를 외워서 부르기 시작했다.

히라가나와 카타카나를 열심히 외워서 읽을 줄만 알게 됐다.

 

 

 

3. どんな願いならばかなえられないと言うのか? (어떠한 소원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가?)

고2 때였다.

이 문장 하나로 교내 일본어 경시대회에서 3등을 했다.

일본어 능력자는 딱히 없는 학교 내에서 일본어 경시대회가 열렸는데,

수업시간에 어느 정도 일본어 센스를 발휘한 내가 참가하게 돼서,

저 문장을 적었다가 3등을 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저건 글레이 GLAY라는 밴드의 ここではない、どこかへ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라는 곡의 가사 중 일부였다.

 

 

다음 해인 3학년 때에는 또다시 교내 일본어 경시대회에 참가해서 1등을 하게 된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교를 복학했다가 한 학기만 다니고 다시 휴학을 했다.

그때가 2008년 초였다.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휴학을 한건 아니었다. 유학은 생각도 하지도 않던 때였다.

유학은 집에 돈이 많아야만 가는 줄로 알았었고, 혼자 힘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자주 들어가던 음악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웹사이트에서

집안의 도움도 없이 혼자 맨땅에 헤딩하듯 일본을 다녀온 어떤 사람의 경험담을 읽게 되었다.

 

긴 글도 아니었고, 디테일한 내용의 글도 아니었지만 살짝 두근거렸다.

저런 거.. 나도 할 수 있는 건가..?

정말 혼자의 힘으로 유학이 가능한 건가..?

 

그 사람이 글에 적어놨던 것처럼 무조건 유학원에 상담부터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 내가 사는 광주에도 괜찮은 유학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서울에 있는 유학원들이 더 제대로 되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서울에 있는 어느 한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게 되었다.

직접 가서 상담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으면, 직접 갈 용기까지는 없어서 접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유학원은 당시에.. 네이트온 상담이 가능했었다.

(네이트온이라는, 당시에 많이 쓰던 메신저가 있었다.)

첫 상담부터 거의 두세 시간을 대화 한 나..

상담이 끝난 후, 내가 모아둔 돈으로 어떻게든 일단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아빠에게도 이야기했다.

당연히 두 분 다 처음엔 깜짝 놀라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돈을 주라고는 말이 아니라고, 나 혼자 알아서 가서 다 해결하겠다고 말하는데,

막을 방법이 없으셨을 거다.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유학원에서 말한 초기에 필요한 비용이 있다.

비행기 왕복 티켓과 유학원에서 제공하는 기숙사 3달치 월세,

그리고 일본어 학교 6개월치 학비 등등..

상담을 받았을 당시의 환율로는 그게 약 700만 원 정도였다.

나는 술・담배도 안 하는 데다가 그 외 다른 과소비도 거의 없는 편이라서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돈이 조금 있었다.

여기서 몇 달만 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으면 그 돈은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일본어학교를 다니면서 얻게 되는 비자는 취학비자라고 하는데,

그게 2년까지 가능하단다.

일본어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엄청 빡세게 해서

2년 동안 일본어 공부도 하면서 일본에 있는 음악전문학교에 갈 학비를 모아서

취학비자가 끝날 때에는 음악전문학교로 진학을 하자는 계획이었다.

음악전문학교로 진학하면 유학비자를 다시 딸 수 있게 된다.

 

고생은 좀 하겠지만, 계획대로 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그때에도 도쿄는 최저시급이 900~1,000엔대였다.

 

 

 

 

 

 

2009년 1월 4일이 출국이었다.

친구들에게는 '나 가면 적어도 4년 동안은 일본에 있을 거야' 라고 말하며 다녔다.

 

유학원에서 말한 초기 비용은 아빠께서 내주셨다. (도와주지 않으셨어도 갈 수는 있었지만..)

아빠와 나의 관계는 복잡하다.

같이 산 기억이 없다.

그래서 나에게 잘해줬다거나

보통의 집에는 있을 법한 따뜻했던 아빠의 기억이라던지.. 그런 것이 없다.

항상 어색하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응원해준 적도 한 번도 없다.

항상 반대부터 하셨다.

그러니 더더욱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아빠가 초기 비용은 내줘서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일본에 간다는 것을 말했다.

일본에 가기로 결정한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말했다.

할아버지는 항상 화가 많으셨다.

항상 만나기만 하면 잔소리를 하셨고, 뭘로 꾸중을 듣게 될지 몰라서 눈치만 보게 되는.. 무서운 존재였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까지 말하는 것을 미뤘던 것 같다.

역시 화를 내신다. 그런데 내용이 달랐다.

언제 정해진 거냐고, 왜 그걸 이제야 말하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몇 달 전에 일본에서 친척이 왔다 갔었다는 것이다.

미리 알았으면 인사라도 시켰을 것이라며..

 

?? 일본에서? 친척??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에게는 친형이 계셨고,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어서 존재조차도 몰랐다..)

전쟁이 끝난 후에 친형은 일본에 남게 돼서, 그쪽 가족들이 지금은 다들 일본에서 터를 잡고,

일본 국적으로, 한국어는 전혀 못하는 채로, 정말 일본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단다.

할아버지의 친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신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주소와 전화번호가 그대로인지 의심되는 옛날에 적어두신거 같은 수첩을 꺼내셔서

일본의 할머니와 고모의 이름을 적어주시며, 주소와 전화번호를 옮겨 적어주셨다.

일본에서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거에 민감하니까 정말 필요한 때에 연락하라는 당부와 함께..

 

그리고는 일본에 그런 친척들이 있었다는 신선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돌아가신 형님 이야기를 해주시기 시작하시는데..

야쿠자이셨다고 한다.

 

...?

 

전쟁이 끝난 직후라서 아무래도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을 업신여기는 분위기가 있으니,

일본인들이 함부로 건들지 못하도록,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그 길을 택하셨단다.

뭔가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옆에서 왜 고인이 되신 분을 욕되게 그런 이야기를 하냐고 뭐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적어준 주소와 연락처의 쪽지가 쥔 손에서 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출국 당일날..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조지 거슈인 George GershwinRhapsody in Blue를 들었다.

 

정말로 가는 건가..

예전부터 정말 꿈꿔왔던 나라로...

이거 현실 맞나...?

 

이런 생각을 하며 갔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현재 일본 불매운동에 열심히 동참 중인 사람 중에 한 명임을 밝혀둡니다.

 

 

 

다음 편에 계속..

 

 

 

일본, 도쿄에서 맞이한 첫 아침의 사진.jpg

 

 

 

다음 이야기

 

일본에서 첫 알바를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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